런던 패션위크, 왜 다시 가십걸을 소환했나
20년 주기설이 런웨이에서 증명된 순간
20년 주기설이 런웨이에서 증명된 순간
런던 패션위크 2027년 봄여름(SS27) 시즌 스케줄에서 한 미국 드라마의 이름이 세 번이나 등장했다. 2007년 첫 방영을 시작해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상류층 십대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다룬 드라마 '가십걸'이다. 패션은 20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통설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드라마가 세상에 나온 해가 2007년이었고 지금은 정확히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시점이다. 한 쇼에서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오마주였다면 그저 우연으로 넘어갔겠지만, 이번 런던 패션위크에서는 서로 다른 쇼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드라마를 소환하며 세 차례나 반복됐다. 그러면서 이것이 개별 디자이너의 취향이 아니라 이번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라는 신호로 읽히기 시작했다. 한 시즌 안에서 같은 레퍼런스가 세 번 겹치는 일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업계 안팎에서는 벌써 이번 SS27을 '가십걸 시즌'으로 부르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무엇이 달라졌나
가장 뚜렷한 사례는 베이징 출신, 런던 기반 디자이너 오스카 오양(Oscar Ouyang)의 무대였다. 그가 온스케줄 런웨이 쇼로는 세 번째로 선보인 이번 컬렉션의 이름은 '시그넷(Cygnet)', 아직 깃털이 하얗게 자라지 않은 아기 백조를 뜻한다. 콘셉트는 젊은 세대가 부모나 조부모의 옷장을 뒤져 낡은 옷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조합하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여기에 런던 상류층 자제들 특유의 프레피(preppy) 룩이 겹쳐졌다. 흥미로운 지점은 캐스팅이다. 런웨이에는 톱모델 크리스틴 맥메나미의 딸 릴리 맥메나미, 오아시스 리암 갤러거의 아들 레넌 갤러거가 올랐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가십걸 시즌1 4화, 블레어가 어머니 브랜드의 얼굴 자리를 세레나에게 빼앗기는 장면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유명인의 자녀가 모델로 서고, 그 배경음악은 '누가 그 자리를 물려받는가'를 다투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무대 안팎의 설정이 정확히 겹쳐 읽혔다. 옷장을 뒤져 정체성을 재구성한다는 콘셉트와, 실제로 유명인 2세가 무대에 올라 부모 세대의 이미지를 이어받는다는 캐스팅이 서로를 비추는 구조였던 셈이다.
왜 지금인가
이 흐름이 우연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여러 갈래다. 우선 2000년대 초중반 감성, 로우라이즈 데님이나 화려한 액세서리, 과시적인 부잣집 자제 이미지는 이미 몇 시즌째 SNS와 스트리트 신에서 조용히 되살아나고 있었고, 이번 런던 패션위크는 그 흐름을 런웨이라는 공식 무대 위로 끌어올린 사례에 가깝다. 런던 패션위크는 파리나 밀란에 비해 신진 디자이너 비중이 높고 팝컬처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데 상대적으로 거리낌이 없는 무대로 꼽혀 왔다는 점도 이런 레퍼런스가 유독 이곳에서 먼저 터져 나온 배경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미 대중이 잘 아는 익숙한 아이피(IP)를 가져오는 방식은 새로운 개념을 처음부터 설명할 필요 없이 관객의 향수를 즉각 자극한다는 점에서, 짧은 영상으로 소비되는 지금의 패션쇼 유통 방식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유명인 2세들의 캐스팅 역시 '그 시절 아이콘의 자녀가 그 시절 미학을 입는다'는 서사를 자연스럽게 완성시키는 장치로 작동했다. 20년이라는 시간은 그 시절을 실제로 겪은 세대가 지금 소비력을 가진 30대 후반에서 40대가 됐고, 그 자녀 세대는 부모의 옷장과 사진을 직접 재해석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에 볼 것
앞으로 지켜볼 지점은 이 레퍼런스가 런던에서 그치는지, 아니면 뒤이어 열리는 밀란과 파리 패션위크로 번지는지다. 패션위크 캘린더는 도시별로 순차 진행되는 만큼, 같은 시즌 안에서 비슷한 회귀 정서가 다른 도시의 쇼에서도 발견된다면 이는 한 디자이너의 개인적 취향을 넘어 SS27 시즌 전체의 방향성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오스카 오양의 '시그넷' 같은 프레피 룩이 실제 매장 상품으로 이어져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형태로 내려오는 시점도 관전 포인트다. 런웨이 컬렉션은 통상 반년가량의 시차를 두고 실제 판매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번에 무대에 오른 옷들이 내년 봄여름 상품으로 매장에 걸릴 때 이 흐름이 얼마나 대중적으로 확장됐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다른 디자이너들이 가십걸 외에 또 다른 2000년대 팝컬처를 끌어오는지도 이 복고 흐름이 한 작품에 대한 헌사인지, 한 시대 전체에 대한 재조명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될 전망이다. 쇼 영상이 SNS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재편집되는지도, 이 레퍼런스가 패션계를 넘어 대중적 화제로 번지는지를 가늠할 또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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