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페차 SS27, 모유가 흐르는 런웨이의 의미
모성을 성역 아닌 스펙터클로 바꾼 무대
모성을 성역 아닌 스펙터클로 바꾼 무대
런던 패션위크 무대에 아기와 임산부, 그리고 우유가 함께 올라왔다. 그리스 출신 디자이너 디페차(Di Petsa)가 공개한 2027 봄여름 컬렉션 "HOLY MILK"는 임신한 리앤 피녹(Leigh-Anne Pinnock)이 직접 런웨이를 걷고, 모델들이 우유가 담긴 잔을 들고 걸으며, 마지막에는 조각처럼 만든 수유 브래지어 구조물이 좌석 앞으로 우유를 흩뿌리는 퍼포먼스로 마무리됐다. 단순히 화제성을 노린 연출이 아니라, 출산과 수유라는 지극히 사적인 신체 경험을 패션위크라는 가장 공개적인 무대의 정면에 세웠다는 점에서 지금 이 쇼가 눈길을 끈다. 우유를 뿜어내는 브래지어 장면처럼 한 컷만 떼어내도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강렬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 쇼는 패션 화보 이상으로 SNS에서 따로 잘려 돌아다닐 조건을 처음부터 갖추고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나
이번 컬렉션의 제목 "HOLY MILK"가 보여주듯, 디페차는 모성을 아이를 낳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거쳐 가고 벗어던지고 결국 되어가는 여러 버전의 자기 자신으로 확장해 다뤘다. 화이트와 투명한 레이어, 은은하게 빛나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브라이덜 실루엣과 몸에 밀착하는 드레이핑, 델리킷한 레이스, 노출된 피부를 나란히 배치했으며, 딥블루와 블랙, 리퀴드 골드가 이 부드러움 사이를 가르며 드라마틱한 대비를 만들었다. 주얼리 브랜드 Awe Inspired와의 협업으로 진주와 체인, 원석, 태양 모티프가 맨몸 위에 그대로 얹혔고, 디페차의 시그니처인 "WET" 라인은 이번에도 물이라는 소재적 집착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가장 파격적인 지점은 마지막 순간이었다. 조각적으로 제작된 수유 브래지어가 런웨이 위로, 그리고 아래 앉은 모델들 머리 위로 우유를 뿜어냈는데, 이는 기존 패션위크가 임신·수유하는 몸을 감추거나 최소한으로만 암시해온 관행과 정반대로, 그 신체를 스펙터클의 주인공으로 정면에 세운 연출이었다.
왜 지금인가
패션위크에서 임산부 모델과 출산 이후의 몸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것도 브랜드의 메인 스토리텔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동안 업계는 마른 몸, 완성된 실루엣을 기본값으로 삼아왔고, 임신이나 수유는 화보 밖에서 조용히 처리되는 개인사에 가까웠다. 디페차는 애초에 "고대 그리스 여신" 이미지와 물에 젖은 듯한 소재로 몸을 신성시하는 작업을 해온 브랜드였고, 그 연장선에서 모성이라는 주제를 다음 소재로 택한 흐름은 자연스럽다. 동시에 최근 패션·뷰티 업계 전반에서 산후 몸, 수유, 육아라는 소재가 더 이상 숨겨야 할 사생활이 아니라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정체성의 일부로 다뤄지는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유명인이 임신 사실을 SNS와 런웨이 양쪽에서 동시에 보여주고, 브랜드가 그 서사를 캠페인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최근 흐름 속에서, 디페차의 이번 쇼는 그 정서를 가장 극단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인 사례로 읽힌다. 패션위크가 시즌마다 치열해지는 "한 장면" 경쟁 구도라는 점도 이 타이밍을 설명한다. 옷 자체보다 쇼가 끝난 뒤 어떤 이미지가 오래 회자되느냐로 브랜드의 존재감이 갈리는 지금, 디페차는 관객석에 앉은 소수가 아니라 그 자리에 없던 대중까지 겨냥한 장면을 설계한 셈이다.
다음에 볼 것
이번 쇼의 임팩트는 컬렉션 자체보다 이후 이어질 반응에서 더 분명해질 가능성이 크다. 우유를 뿜어내는 수유 브래지어처럼 강렬한 이미지 하나는 금세 SNS를 통해 확산되기 마련이고, 그 확산이 브랜드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지 아니면 지나친 연출이라는 반발로 이어질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다. 리앤 피녹처럼 이미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 임신한 몸으로 런웨이에 오른 선택 역시, 앞으로 다른 브랜드들이 캐스팅에서 임신·출산을 어떻게 다룰지에 참고 사례로 작용할 수 있다. Awe Inspired와의 주얼리 협업처럼 컬렉션과 연동된 상품 라인이 실제 판매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디페차가 이 "HOLY MILK" 서사를 다음 시즌에도 이어갈지 아니면 한 번의 강렬한 선언으로 끝낼지도 지켜볼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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