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 데 가르송이 검은색을 내려놓은 이유
왕족의 드레스와 데님이 한 무대에서 만났다
왕족의 드레스와 데님이 한 무대에서 만났다
파리 패션위크 2027년 봄여름 시즌 무대에 오른 "컴 데 가르송"의 신작은, 지금까지 이 브랜드를 설명해온 단 하나의 색, 검정을 걷어낸 자리에서 시작한다. 1969년 설립 이후 반세기 넘게 검정을 정체성으로 밀어붙여온 하우스이기에, 이번처럼 색채를 전면에 내세운 선택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디자이너 가와쿠보 레이는 이번 컬렉션의 주제를 "왕실의 생활과 일상의 생활이 하나가 될 때"라고 직접 풀었는데, 이는 단순한 콘셉트 문구가 아니라 쇼 전체의 설계 원리였다. 브로케이드와 금실로 짠 태슬 같은 귀족적 소재가, 물방울무늬와 핀스트라이프, PVC처럼 누구나 일상에서 마주치는 재질과 한 벌의 옷 안에서 충돌한다. 펑키한 금발 위에 손으로 만든 왕관을 쓴 모델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무대는 "고귀함"과 "평범함"이라는, 원래는 섞이지 않던 두 세계를 억지로 붙여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이 쇼는 단순한 신상 발표가 아니라, 브랜드 스스로 오래 지켜온 규칙 하나를 깨는 순간으로 읽어야 한다. 쇼가 열린 날은 2026년 10월 3일, 다음 해 봄여름을 미리 보여주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이 선택이 한 브랜드의 변덕이 아니라 지금 패션계가 가리키는 방향을 먼저 드러낸 장면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무엇이 달라졌나
가장 먼저 보이는 변화는 색이다. 컴 데 가르송은 오랫동안 검정을 뼈대로 삼아온 브랜드였지만, 이번 시즌에는 주홍색 물방울무늬, 코발트블루, 바래진 녹색, 겨자색까지 다채로운 색채 팔레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단순한 색상 교체가 아니라, 브랜드가 수십 년간 유지해온 미학적 기준점 자체를 흔드는 결정으로 읽힌다. 형태에서도 변화는 두드러진다. 모델들의 실루엣은 바이올린, 기타, 눈사람을 연상케 하는 유기적이고 조각적인 형태로 설계됐는데, 볼륨 있는 드레스 곳곳에 갈라진 틈이 있고, 그 틈 사이로 깃털 장식 같은 "왕실"의 디테일이 비어져 나온다. 다만 그 깃털 중 일부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값싸고 인공적인 소재였다는 점이 핵심이다. 고귀함을 상징하는 디테일 안에조차 일상의 값싼 재료가 숨어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모델들이 쓴 왕관 역시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든 수공예품이었는데, 이는 "왕실"이라는 상징조차 완벽하게 매끈한 완제품으로 제시되지 않았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쇼의 마지막, 피날레는 데님 드레스로 채워졌다. 팬츠 밑단이 트레인으로 바뀌고, 반바지가 버슬을 품은 드레스처럼 부풀어 오르는 등, 데님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소재가 귀족의 실루엣을 완성해냈다. 이 지점에서는 이질적인 소재의 충돌이 사라지고, 두 세계가 하나의 형태로 수렴한다.
왜 지금인가
패션위크에서 "하이브리드"는 새로운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쇼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융합을 매끄러운 성공담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가와쿠보는 백스테이지에서 "왕실의 생활과 일상의 생활은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쇼 중반까지 보여준 것은 균열과 충돌, 분열에 가까운 과정이었다. 두 가치가 부딪히고 깨지는 모습을 먼저 보여준 뒤에야 마지막 데님 룩에서 완성된 융합을 제시한 순서 자체가, 지금 패션계가 공유하는 불안과 맞물린다. 계급과 위계, 서로를 가르는 경계들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그걸 넘어서고 싶다는 희망을 과정째로 무대에 올린 셈이다. 리서치에 따르면 가와쿠보는 이 컬렉션을, 자기표현을 통해 기분을 끌어올리는 패션의 치료적 역할로 설명했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옷이 위안이 된다는 발상은 오래된 것이지만, 그걸 "검정을 내려놓는다"는 브랜드 역사상 드문 결정으로 실행에 옮긴 시점이 지금이라는 사실이 눈에 띈다. 아방가르드의 대명사로 불려온 브랜드가 색을 선택하는 순간은, 보수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으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다음에 볼 것
이번 룩이 실제 매장에 걸리는 시점은 2027년 봄여름 시즌이다. 지금 무대에서 본 색채와 실루엣이 양산 단계에서 얼마나 유지될지, 피날레의 데님 드레스 같은 과감한 실루엣이 상업 라인으로도 이어질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검정을 벗어난 이번 색채 실험이 단발성 쇼 콘셉트로 끝날지, 다음 시즌까지 이어지는 방향 전환으로 자리잡을지가 앞으로 지켜볼 지점이라는 점이다. 패션위크 공개 후 실제 매장 입고까지는 보통 반년 정도 걸리는 게 일반적인데, 이번처럼 쇼 전체의 룰 자체가 바뀐 경우에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원안이 살아남을지가 평소보다 더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된다. 색채 실험이 과감했던 만큼, 양산 단계에서 다시 무난한 색으로 수렴하는지, 아니면 겨자색과 코발트블루 같은 선택이 그대로 유지되는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이 컬렉션을 읽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방가르드 브랜드의 색채 전환은 종종 업계 전체의 분위기를 먼저 보여주는 신호로 작동해왔다. 컴 데 가르송처럼 오래 한 가지 언어를 지켜온 브랜드가 방향을 트는 순간은, 다른 브랜드들에게도 "지금은 바뀌어도 되는 시점"이라는 신호로 읽히기 쉽다. 왕실과 일상, 고급과 저렴함을 한 벌의 옷 안에 함께 두는 방식이 다음 시즌 다른 하우스의 컬렉션에서도 변주되어 나타나는지 지켜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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